며칠 뒤 310일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씨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른바 김예슬 선언’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진리도, 정의도, 우정도 없는 죽은 대학을 통렬하게 들이받는 김예슬 선언문을 교무실 제 자리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로 숨죽여 읽으며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던 기억이 납니다.

 

김예슬 선언 이후,  폭발할 것 같던 청년세대들의 고통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청년들의 캄캄한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은 왜 이렇게 고단할까요?

5주년이 된 김예슬 선언이 이렇게 가깝게느껴지는 것은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언문의 빛나는 언어는 여전히 영롱하기만 합니다. 찬찬히 음미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계삼]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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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였는데도 방 안의 커튼은 모두 내려져 있었습니다. 거실에선 창문을 통해 옆집이나 마당을 다 볼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창문은 꽁꽁 싸매 있었습니다. 닫혀 있는 창문, 내려진 커튼. 그 틈으로 겨우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내 사는 게 이래요.” 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동화전 마을의 권귀영 어머니. 인터뷰를 하면서 사람, 사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할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권귀영 어머니였지만 무엇이 그녀를 동굴 속에 가두어 버린 걸까요. 안타깝지만 여전히 희망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동화전 마을의 권귀영 님을 소개합니다.

 

김우창(이하 나) : 오늘은 날씨도 춥고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가 좋네요. 비도 안 오고.

 

권귀영 어머니(이하 권) : 요 며칠은 집에만 있어서 몰랐어요. 하하하. 여기 봐요. 저는 집에 있으면 이렇게 살아요. 창문은 닫고, 아침이 되면 커튼을 내려요. 저 사람들 보기 싫어서. 밖에 보기 싫어서요.

 

: 아이고. 송전탑도 그렇고. 합의한 주민들과의 관계도 사실상 끊어졌겠네요.

 

: 안타깝죠. 원래는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랑 참 친했어요. 송전탑 싸움을 하기 전 에는. 처음부터 원수였던 건 아니고. 같이 식사도 하고 자주 놀러 가고 또 그 사람들이 놀러 오기도 하고. 나는 우리 집에 누가 놀러 오는 거 참 좋아하거든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근데 이제는 ()은숙이네 말고는 가는 곳이 없으니까. 거기 밭일 도와주러 가거나 그냥 집에 있거나 그래요. 데모를 안 할 때는 그렇게 지내요.

 

: 그럼 이곳이 고향이세요, 밀양에 계속 사셨어요?

 

: 아니에요. 부모님의 고향은 밀양 가곡동이랑 다원근처인데 저는 부산에서 쭉 살았어요. 여기 이사 온 지는 얼마 안 돼요. 7년 됐나?

 

: 그럼 이사 올 때는 송전탑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오신 거예요?

 

: 그렇죠. 그 전에는 계속 왔다 갔다 살다가. 제 작년부터 아예 이사 와서 살았죠. 사실 여기에 친척이 사는데. 그 아즈메가 이 동네로는 절대로 송전탑이 안 들어올 거라고 했어요. 친한 아즈메도 있지, 또 선산도 앞에 있고 집도 예쁘지. 그래서 집을 본 그날 바로 계약 했어요.

 

: 그럼 혹시 이곳에 이사 온 걸 후회하거나 좀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으세요?

 

: 저요? 에이. 아니에요. 일로 이사 오기 잘했죠? 잘했지. 전 우리가 데모하기 잘했다고 생각해요. 안 그랬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 못 만났지.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오고 데모한 거 절대로 후회 안 합니다. 나는 옳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여기 밀양에 오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옳은 지를 절대로 몰랐을 겁니다. 나는 여기 잘 왔다고 생각해요. 사실 부산에 있을 때는 바쁘기도 하고 관심도 없어서 이런 거를 접하질 못했어요.

 

: 그럼 여기 오시고 나서 언제 처음 싸우러 나가셨어요? 송전탑 공사 막으러.

 

: 처음에는 우리 남편이 많이 갔죠. 난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일부러 그런 충돌 상황을 피하기도 했었고. 근데 우리가 이사 오자마자 큰 싸움이 계속 연달아 난 거예요. 바드리에서.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나갔죠. 제일 기억에 남는 건 96번에서 싸운 거예요.

 

: 96번 송전탑이요?

 

: . 96. 난 지금도 제일 가슴에 맺히는 게 그곳이에요. 우리 남편이 96번 현장을 지키면서 그곳에 1미터도 더 되는 돌 탑을 개나 쌓았거든요. 돌 하나하나에 송전탑 반대’, ‘송전탑 건설 반대등의 소원을 빌면서 쌓아 올렸어요. 그때 손가락 골절이 나도 병원에 가지도 않고 참으로 정성스레 세운 탑이에요.

 

: 그럼 그 탑이 이후엔 어떻게 됐는데요?

 

: 제 작년 10월 중순이었나? 그때 이장이던 사람이 하루는 급히 내려오라고 하는 거예요. 중요한 마을 회의가 있다면서.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딱 한 번만 송전탑 현장을 비웠거든요. 태풍이 심하다고 한 날, 그 때 빼고는 계속 지켰는데. 그 사람이 내려가자고 한 거죠.

 

: 그럼 다들 내려가셨어요?

 

: 그 말 듣고 할머니들은 내려갔지. 나랑 남편이랑 록키(강아지). 우리 셋만 지키고 있다가 우리도 할 수 없이 내려갔거든요. 회의를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근데 우리가 내려오자마자 경찰들이 그 앞을 막고 그 안에서 한전놈들이 펜스를 치고 다시는 못 들어가게 한 거예요.

 

: . 그럼 그 이장이란 사람이 앞잡이 노릇을 한 거네요?

 

: 그렇죠. 그때 만해도 합의를 안 했었는데. 그 직후에 바로 합의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마을 팔아먹은 놈이라고 욕을 했어요.

 

: 아 그럼 아버님이 쌓았던 돌 탑은 어떻게 됐어요?

 

: 못 들어갔죠. 근데 당연히 한전이 그것도 무너뜨렸겠죠. 그래서 전 우리 남편이 송전탑 반대를 염원하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그 돌 탑을 지키지 못한 것이 제일로 속상하고 지금도 가슴에 맺혀있어요.

 

: 그렇겠네요. 그것도 믿었던 주민에 의해서 송전탑 부지도 빼앗기고, 그곳에 만든 돌탑까지 무너진 거니까... 그럼 그렇게 힘이 될 때 의지가 됐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 있죠. 박은숙이죠. 지금이야 이 마을에서 제일로 친한 게 박은숙인데. 이사 올 때만 해도 몰랐어요. 싸우면서 알았지. 박은숙한테는 내가 고마운 게 많아요. 우린 소띠 띠동갑 이에요.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참 성숙해요. 뭐든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합니다. 내가 제일 힘들었을 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이라서 나한텐 최고로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래서 난 박은숙이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요.

 

: 그래도 다행이네요. 마을에서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 그럼요. 성숙한 사람이라서 내가 은숙이랑 많이 의논을 해요. 은숙이가 뭐라고 하면 난 듣고, 또 내가 뭐라고 하면 그것에 대해 공감을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우린 둘 다 (성격이) 잘 맞는 사이죠. 짝지죠 짝지. 은숙이랑 내랑 마음이 맞으니까 이 힘든 상황에서도 헤쳐 나가고 있죠. 그렇다고 생각해요. 은숙이 말고도 좋은 사람들 참 많아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송전탑 싸움 하면서 좋은 사람들 참 많이 만났거든요.

 

: 그럼 박은숙 님 말고 의지하는 사람이 또 있으세요?

 

: 홍정수 신부님이랑 감병만 국장님도 있고. 또 연대자들도 있고. 그러고 보니 참 많네요. 하하하

 

: ‘힐링캠프같이 갔던 마음복지관의 홍정수 신부님이요?

 

: 네 맞아요. 송전탑 싸움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 알게 된 인연이에요. 지금은 휴가 중이라서 못 오지만 그 전에도 3주에 한 번 씩 명상이나 상담하러 오셨잖아요? 올 때마다 항상 우리 집에서 머물렀어요. 지금은 2층에 연대자들 자라고 황토방을 올렸지만, 예전에는 그것도 없었거든요. 그땐 그냥 우리 생활하는 1층에서 같이 주무셨어요. 우리 부부는 안방 쓰고, 신부님은 그 옆방에서 주무시고. 그렇게 알게 된 게 벌써 3년이 되네요.

 

: 아 제가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알고 계신 거네요? 3년이나 됐으면, 큰 힘이 됐겠어요. 힘들도 지칠 때마다.

 

: 많이 의지가 되죠. 밀양에 오실 때마다 함께 명상도 하고 상담도 하고 또 고민이 되는 게 있으면 이야기도 나누고. 어떨 때는 전화로 내 힘든 거 말하면서 울기도 해요. 그렇게 하고 나면 좀 풀리죠. 마음도 건강해지는 것 같고. 혼자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되니까. 송전탑, 찬성한 주민... 골치도 아픈데 그럴 때마다 의지가 되는 사람이죠.

 

: 뭔가 홍정수 신부님이 어머니의 마음을 지켜주는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박은숙 어머니 같은 경우는 곁을 지켜주면서 의지도 되고 같이 웃기도 하고요.

 

: 그렇죠. 또 있어요.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동화전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분도 있어요. 감병만 국장님이라고.

 

: ~ 마창진 환경운동연합의 전 국장님 맞죠? 최근에는 동화전마을에서 몸살림도 함께 하시는 분 맞죠?

 

: 맞아요. 감 국장님도 우리 동화전마을에 오래 전부터 힘을 주신 분이에요. 몇 년 전 송전탑 싸움을 하면서도 감 국장님이 와서 몸살림이라는 것을 해줬어요. 우리 몸이 건강해야 잘 싸울 수 있다고 하면서.

 

: 근데 몸살림이 뭐예요? 저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안 돼서 전 아직 보지도 못했네요.

 

: 그냥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자세도 바로잡아주고 교정도 해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개인적으로 감 국장님이 와서 해줬거든요. 근데 그 자리에 우리 동네 할머니들까지 부르게 되면서 크게 된 거죠. 그때도 감 국장님은 항상 와서 저희 몸도 봐주고, 틀어진 부분이나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교정 같은 것도 해주고. 또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후배들도 여러분 같이 와서 할머니들을 일대일로 다 해줬어요. 얼마나 고마웠는데. 다들 평생 농사를 지으셔서 몸이 성치 않은데. 또 송전탑싸움하면서는 경찰이나 한전이랑 몸싸움을 하니까 성할 날이 없었죠. 근데 그렇게 몸살림을 하면서 다들 몸도 좋아지고 위로도 많이 받고. 그렇게 버텨나간 거죠. 저도 그렇고 우리 마을도 그렇고.

 

: 감 국장님과도 오래전부터 그런 인연이 있었네요. 근데 몸살림이라는 거 진짜 좋은 것 같아요. 건강도 지키고 또 함께 그렇게 모여서 하니까 마을 사람 끼리 돈독해지기도 하고요.

 

: 맞아요. 몸살림 하고 나서 다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그 밥 한 끼가 굉장히 소중하더라고요. 물론 몸살림 그 자체도 좋지만 그것보다 밥 한 끼 먹으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웃으니까 그게 더 좋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웃고 얘기하고. 사실 한 마을에 살면서도 서로 농사짓기 바쁘니깐 이렇게 모을 기회가 없으면 또 모이기도 힘들어요. 근데 몸살림을 다시 시작하면서 이렇게 모이게 된 거죠. 또 모이면 이야기도 하면서 서로 웃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왔습니다. 고마운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 몸을 건강하게 지켜주고, 마음을 지켜주고, 곁을 지켜주는 사람.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옆에서 의지가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런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 힘든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온 원동력이 무엇인지.

 

: 물론 사람이죠, 사람. 은숙이를 포함해서 우리 동화전 주민들도 참 고맙고, 신부님이랑 감 국장님도 고맙죠. 전 정말로 데모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데모 안 했으면 이렇게 고마운 사람 못 만났을 거잖아요. 근데 우리에겐 숙제가 있어요.

 

: 숙제요?

 

: 비록 송전탑은 다 섰지만 숙제가 있어요. 전기를 안 흐르게 만드는 거죠. 우린 끝까지 싸울 거예요. 우리를 응원해주는 연대자들을 위해서 송전탑 뽑을 때까지 싸워야죠. 또 정부가 잘못된 행동을 하니까 이렇게 막는 거고, 끝까지 할 겁니다.

 

2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때로는 함께 글썽이다가 함께 웃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아 보였습니다. 더 듣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 더 하고 싶은 이야기요? 많죠. 근데 딱 하나만 꼽으면 갈수록 데모가 힘들다는 거예요. 대책위도 그럴 것 같아요. 맞죠? 힘들죠?

 

: (뭔가를 들킨 것 같아 민망해 하며하하하

 

: 예전에는 그냥 송전탑 공사를 막으면 됐는데. 물론 하루하루 싸우는 게 참 힘들고 고역이었지만. 그땐 그 하루 열심히 싸우면 됐거든요. 근데 지금은 송전탑 공사도 다 끝이 났고, 전기도 조금씩 흐른다고 하니까.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참 어렵게 됐어요. 합의한 사람들이 하도 말들을 많이 하니까 흔들리는 할머니들도 많고. 그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단디(세게) 잡아야 하는데. 근데 그게 잘 안 보이니까. 또 연대자도 뜸해지고 있고. 제일 두려운 건 우리 밀양의 이야기가 묻히는 거죠. 관심이 사그라지는 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 모든 사람들이 밀양을 잊진 않을까 무섭고 겁이 나죠.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컥했고 또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히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밀양 주민들이 다시 힘을 얻고 저 송전탑을 뽑아내게 만드는 것도 사람의 힘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기꺼이 함께 나누는 당신의 손이 필요합니다. 밀양의 손을 잡고 굳게 닫힌 창문을 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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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도 신경기변전소 후보지 주민들 밀양 방문(2월 3일)


 여러 언론에서 '2의 밀양 사태'를 우려하고 있는 신울진-신경기 765kV 송전선로의 신경기변전소 후보지역의 하나인 여주군 주민 32명이 밀양 현장을 찾으셨습니다.

 밀양 4개면 주민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한전'이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는 사람들로 함께 밥을 먹으며 금세 친구가 되었습니다. 밀양 주민들은 10년 투쟁의 노하우를 전수해주기에 여념이 없었고, 여주 주민들은 철탑이 이미 들어섰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한전과 맞장뜨고 있는 밀양 주민들에게 위로와 감탄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연대하면 한전한테 미움받을까봐 연대를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연대해야 이깁니다. 밀양도 전국적인 연대가 좀 늦었습니다. 시작부터 연대하면 됩니다'


 짧고 굵은 질문과 답변들, 그리고 떡과 과일과 정겨운 선물들을 나눈 만남이었습니다.




 

2. 밀양 마라톤 선전전(2월 15일)


 밀양 마라톤 대회가 있는 날, 밀양 주민들이 나섰습니다. 오늘도 밀양 송전탑 반대 어르신들은 "송전탑 반대","핵발전소 반대"를 외칩니다. 이와 함께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힘내라고 징과 북을 치며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마라톤에 참여한 사람들의 일부도 우리의 진심을 알았는지 "송전탑 반대","밀양 화이팅"이라고 말하며 힘을 주셨습니다. 열심히 뛰십시오. 우리도 더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3. 밀양 송전탑 투쟁 10년의 기록 '오래된 희망' 관람(2월 25일)


 어르신들과 함께 버스 한 대를 빼곡히 채워서 창원에 '오래된 희망' 첫 상영회에 다녀왔습니다. 밀양의 어르신들의 10년간 투쟁하신 기록들과 핵발전이 얼마나 끔찍한 발전인지, 어르신들이 죽음의 전기를 만드는 에너지마피아들에 맞서는데 당당한 깃발이 되는지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영화를 본 소감을 나눴습니다.

 

" 온 나라에 이 영화가 퍼졌으면 좋겠다."

 

"비록 철탑이 섰지만 끝까지 싸우자. 역사는 우리를 기록해줄 것이다."

 

 돌아보기에는 끊임없이 아픈 기억들이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서로를 다독여주시고 자부심을 가지시는 모습들이 아름다웠습니다.

 


 

4. 밀양 송전탑 벌금형에 대한 불복종 선언, 노역형 결의 

   기자회견(2월 26일)


 “경찰이 70대 할머니를 무자비하게 고착하고 팔을 비틀고 끌어낸다.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경찰의 몸에 한 두 대 맞는 수가 있다. 그러면 곧장 경찰은 할머니를 체포하고 경찰서로 연행해간다. 그리고 경찰서와 검찰청사 법원을 들락거리는 모욕을 당하고, 끝내 기백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이것이 바로 경찰국가의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도저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당한 국가기구를 유지하는데 쓰여지는 돈을 낼 뜻이 없으며, 노역형으로써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 밀양송전탑 불복종 노역 선언 기자회견문 중


 2013126번 움막에서 고착된 할머니를 보호하려다가 억울하게 연행되어 400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된 연대자 최*님을 시작으로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한 불복종 노역선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5. 몸살림 운동이 4개면으로 확대


 마창진 환경운동연합의 감병만 전사무국장님께서 동화전 마을을 매주 방문하여 진행하셨던 몸살림 운동이 여러 주민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4개면에서 진행되기로 했습니다. 투쟁에 지쳐 그동안 돌보지 못 한 몸을 살피며, 몸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회복되는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6. '밀양아리랑' 서울 상영회


 밀양아리랑서울 상영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160여석의 관람석이 꽉 차고도 모자라 상영관 통로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이 있을만큼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상영회에 참석한 밀양의 주민들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정세 속에 잊혀진 것 같았던 밀양 이야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굴하지 않는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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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시간 송년회(2014. 12.15~17)

20141215일부터 17일까지 밀양과 청도 송전탑 반대 주민 23명과 활동가 14, 미디어활동가, 언론사 취재팀, 사진 작가, 기록노동자 등 45명이 버스 한 대를 꽉 채워 23일의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전국의 투쟁현장을 돌며 연대의 마음을 나누고, 한전 나주 본사 앞에서는 집들이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연대의 감동이 있는 송년회였습니다.


















115번 움막농성(2014. 12.26~현재)

한전의 시험송전에 항의하며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연말부터 지금까지 115번 철탑 아래에서 움막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지하려 했던 시험송전은 결국 시작되었고, 움막에 공급되던 전기를 한전의 저열한 횡포로 인해 끊기기도 하였지만 주민들은 굴하지 않고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힐링캠프(2015. 1.20~22)

힐링캠프에 다녀왔습니다. 그간 투쟁 현장에서 유순한 성품을 버리고 투사로 분해야만 했던 주민들의 마음에 남은 아픔들을 함께 치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족같았던 마을 공동체는 깨지고, 삶터는 괴물같은 송전탑에 짓밟혔지만, 함께이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쌍용차 범국민대회(2015. 1.24)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다녀왔습니다. 혹한의 겨울바람을 견디며 움막과 굴뚝에서 함께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밀양 주민들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어머니의 마음으로 힘껏 안아주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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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발표되었지만,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글이 있습니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오랜 시간동안 청년들의 일터 현장에서 함께 생활하고 경험한 실감을 바탕으로 작성한 <그들과 통하는 길-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빈곤 청년의 실상>이라는 보고서입니다.

 

 


세계 최고의 총기사고 빈발 국가인 브라질은 매년 인구 10만명당 19명이 총에 맞아 죽습니다. 거의 전쟁 수준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매년 인구 10만명당 43명이 자살합니다. 어느 나라가 더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안수찬 기자의 보고서는 이 질문에서 비롯합니다.

 

이 보고서는 우리 사회의 교육, 언론, 정치, 복지, 사회운동의 존립기반과 비전을 뒤흔듭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밀양송전탑 싸움에 뛰어들기 이전, 학교를 그만 둘 당시 제 뇌리를 지배하던 커다란 질문 앞에 다서 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는 먹먹합니다.

 

http://ppss.kr/archives/36592

 

이 글을 꼭 한 번 읽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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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마을 김길곤 할아버지

 

한전의 시험 송전을 저지하기 위해 농성을 시작한 것이 20141226일입니다. 벌써 한 달도 훌쩍 넘었습니다. 115번 송전탑 앞에 세운 농성장에서 그 동안 참 많은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처음 알게 된 주민도 있고, 안면은 있지만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주민도.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많은 주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한 분을 소개하려합니다. 농성을 시작한 1226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며 한전과 경찰은 우리들이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고 싸우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평밭마을의 김길곤 할아버지입니다.

 

뇌줄중 앓고 있던 나를 치료해 준 것이 이 평밭마을과 화악산이지요.

 

김우창 (이하 나) : 다른 마을도 참 아름답지만, 이 평밭마을은 유독 아름다운 것 같아요. 화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경치도 예쁘고, 공기도 좋고요.

 

김길곤 할아버지 : 맞습니다. 참 예쁘죠. 공기도 맑아요. 내가 여기로 이사 온지가 올해로 19년이나 됐는데.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 그럼 이곳이 고향이 아니신가 봐요?

 

김길곤 할아버지 : 무안이 고향인데예. 밀양시 무안면. 그래도 여기 온지가 거의 20년이 다 됐으니까, 2의 고향이나 다름없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 고향인 무안면을 두고 왜 이곳으로 이사를 오신 거예요?

 

김길곤 할아버지 : 음 어디서 살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근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곳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을 못 찾겠더라구요. 그래서 이곳에 오고 싶었어요. 참 좋잖아요. 여기서 자면 도시에서 자는 것 보다 기분도 좋고. 아침에 나가면 공기가 참 좋아요. 원래는 3가구밖에 없었는데. 몸 안 좋은 분들이 수양하러 많이들 왔어요. 지금도 몸 안 좋은 사람들이 쉬러 많이들 오거든요.

 

: 아 맞아요. 사라할머니도 이곳에 오신 뒤로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어요.

 

김길곤 할아버지 : 아이고 말도 마이소. 그 할머니는 지금도 뭐 쨍쨍합니다. 허허허... 나도 뇌졸중 앓았었는데.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더라구요, 주위사람들은. 내가 뇌졸중을 앓았었는지를.

 

: 뇌졸중을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김길곤 할아버지 : 여기 처음 올 무렵에 뇌졸중을 앓고 있었어요. 2년 전만 해도 운주암까지 매일 걸어 다녔어요. 물론 운주암까지 가는 데 꼬박 한 달이나 걸렸어요. 첫 날은 집에서 조금밖에 못가고 힘드니까 돌아오고. 대신 다음 날은 조금 더 가고. 조금 더 가고. 그렇게 해서 한 달이 되니까 운주암까지 갈 수 있게 되더라구요. 비 오는 날 빼고는 매일 갔어요.

 

: 평밭마을과 화악산이 정말로 회장님(평밭마을 자치회 회장이라 마을 사람들은 김길곤 할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의 건강을 되찾아 준거네요?

 

김길곤 할아버지 : 그럼요. 화악산 덕분에 건강을 찾았죠. 봄 돼서 산 정상에 가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보기 좋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참 좋아요. 정상에서 보는 단풍이. 그래서 부산사람들이 오면 하나같이 이거 뭐 내장산에 갈 필요 없겠네.”라고 말을 해요. 그만큼 예쁘다는 거죠. 저 계곡에는 가재도 있어요.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반딧불도 예전에는 있었고. 그건 쪼끔 오래된 얘기지만. 근데 765(765천 볼트 송전탑)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지요. 저것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 받고. 그것만 없었으면 여기가 참 살기 좋은 곳이라.

 

밀양주민들에게 있어서 송전탑 이야기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주제인 송전탑 그리고 전쟁 같았던 싸움들.

 

: 지금까지 10년 넘도록 한전을 상대로 싸워오셨는데. 가장 힘들고 끔찍했던 적은 언제였어요?

 

김길곤 할아버지 : 물론 6월이죠, 행정대집행이요. 그건 참. 완전히 폭거였어요. 행정대집행은 원래 공무원이 하기로 돼있거든요. 경찰이 하는 게 아니고. 경찰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있는 거고. 근데 그날은 완전히 경찰이 해버렸지. 뭐 할머니들이야 고작 해봐야 열 몇 명 뿐 이고. 외지에서 연대자들이 몇 사람 와 있었고. 근데 경찰은 3000명이나 왔잖아요. 할머니 몇 사람 데려 갈라고 몇 백 명, 몇 천 명이 온 거 아닙니까. 할머니들, 힘 센 장정들이 건드리면 넘어갈 정도로 힘도 없는데. 그래가지고 이 힘없는 할머니들이 경찰들 폭행했다고 몇 백 만원씩 벌금 내게 하고. 아이고. 기가 막힙니다. 이런 할머니들한테 맞을 거면 경찰하지 말아야지. 그게 무슨 경찰이야. 배지 반납해야지.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 오시던 김길곤 할아버지였지만, 참혹했던 6월의 기억을 떠올리니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년도 더 된 일이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그날의 상처들.

 

김길곤 할아버지 : 그때 목에 쇠사슬을 매고 다 같이 있었거든. 근데 경찰들은 절단기 가지고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후벼 파서 쇠사슬을 잘라 버리고. 소 잡는 칼로 천막을 북북 찢어 버리고. 경찰들이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근데 버젓이 자기들이 맨 앞에서 하니까. 그땐 워낙 사람이 없으니까. 몇 사람 안 되니까 할머니들이 급한 대로 발가벗었어요, 억울하고 분하니까. 그 상태로 구덩이 파놓은 곳에 앉아 있는데 순경들이 들어오는 거야. 근데 여경이 아니라 남자 순경들이었어요. 아휴. 남자 순경들이 들어와서 발가벗은 할머니들을 거꾸로 매달아서 밖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건 정말 아니잖아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 경찰들이 또 수녀님들의 머리 수건을 막 벗기고, 수녀님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그렇게 해서 한 수녀님은 팔을 크게 다쳤어요. 몇 달 고생했다 아입니까.

 

: 그날 할아버지도 129번에 계셨군요. 화도 나고 분통이 터졌겠어요. 몸을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김길곤 할아버지 : 몸은 괜찮아요. 억울하죠. 화도 나고. 물론 우리가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이 할머니들은 절대로 나쁜 짓 한 거 아니거든? 이 할머니들이 그리 하는 거 뭐 때문에 하겠어요? 아랫마을(위양마을)의 할머니도 그렇고. 다들 선산도 있고 이곳이 고향땅이거든. 어릴 때부터 논밭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거든요. 땅을 닮아서 아주 순박하고 우직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자연이 그렇듯이 흙이 그렇듯이. 정직 하거든예?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뇌물 같은 거에 홀딱 넘어가는 사람 절대 아닙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지키겠다는 거 아닙니까. 평생 논밭을 일구고 그것을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 그거 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렇고. 이젠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무슨 돈을 바라겠어요. 무슨 보상을 바라냐구요.

 

그렇게 두렵고 치가 떨리는 시간들을 보냈으면서 여전히 합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길곤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250여 세대의 밀양 주민들. 겁이 많은 저는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던질 수 없는 질문. 무엇을 지키고 싶어서 이 힘든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는지를요. , 나라면 10년간 싸울 수 있었을까...

 

: 그렇게 억울하고 화도 나고.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는 지난 10년이었을 텐데요, 무엇이 할아버지를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게 만들었어요?

 

김길곤 할아버지 : 다른 거 없어요. 이 마을 사람들 돈 몇 푼 줘도 싫다고 안 받아요. 이 살기 좋은 마을을 이대로 내 자식에게, 후대에게 주고 싶은 거 그거 밖에 없어요. 화악산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 이걸 어떻게 돈으로 매길 수가 있겠어요. 우린 돈이 아니라 이 자연 그대로를 주고 싶어요. 내가 이곳에서 몸과 마음이 나은 것처럼, 이 좋은 곳에서 옹기종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우리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 집에 도둑이 들어오는데 어느 집주인이 가만히 도둑을 보고만 있겠어요? 당연히 도둑을 막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그게 정당방위인데. 우리 땅과 마을을 침범하려는 도둑을 막고 있는데 도리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니까. 무슨 세월이 이렇게도 수상한지.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어요. 그 분 땅이 128번 송전탑 부지였거든. 할아버지가 도통 합의를 안 해주니까 한전놈들이 공탁금을 걸어놓고 공사를 막무가내로 강행했나봐요. 할아버지야 당연히 모르고 있었는데, 떡하니 세금 고지서가 날아왔다고 하네. 그래서 그런 적이 없다고 이상하다고 해서 알아보니 그게 토지 거래에 대한 세금이라는 거야. 허 참. 분명 공탁금은 찾지도 않았는데. 합의를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법인지는 몰라도 한전이 그냥 공탁금을 걸어놓고 이 땅을 사버린 거야. 아니 훔쳐간 거지. 그래서 세금이 나와 버린 거지. 본인도 모른 사이에. 도둑이 도리어 주인에게 큰 소리 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되지.

 

: 정말 수상한 세월이네요. 합의한 적도 없는데 토지는 이미 거래가 되니. 행정대집행도 그렇고 이런 한전과 국가의 동의 없는 강행들이 계속되면 힘이 빠질 것도 같은데.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김길곤 할아버지 : 있지. 연대자들이지. 연대자들이 없으면 우린 이렇게 못했어요. 그날도, 행정대집행날에 경찰들이 모든 길을 차단해서 연대자들을 움막으로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때 미리 들어온 수녀님들이 몇 분 계셨고. 나머지는 평밭마을의 남한사람-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때 수녀님들이 어떻게 올라오셨는지 아십니까? 승용차 뒤 트렁크에 웅크린 채 여기까지 왔어요. 그 좁은 공간에 둘 셋이 30분 이상 여기까지 오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트렁크에서 내려 수녀님들과 눈이 마주치는 데 어찌나 미안하고 고맙던 지요.

 

: 그날 새벽에 험한 산을 타고 넘어온 연대자들도 꽤 많더라고요. 밤중에도 경찰들이 온 길을 막고 있었으니까요. 밑에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발만 동동 굴릴 순 없었고. 그래서 연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적게는 3시간에서 많게는 5시간 걸려서 산을 넘어 왔더라고요.

 

지난 1228일 한전은 주민들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기를 흘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밑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농성장에 있었는데도 말이죠. 정말로 한전의 말처럼 이대로 끝이 난 걸까요? 이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일까요? 아닙니다. 아직도 밀양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송전탑을 뽑아달라고. 그저 예전처럼 살게 해달라고요. 김길곤 회장님의 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혹시 할아버지도 꿈이나 소원 같은 거 있어요? 바라는 거요.

 

김길곤 할아버지 : 가장 바라는 것 한 가지는 당연히 송전탑 뽑아내는 거지. 주렁주렁 매달린 송전선도 보기 싫고, ‘지지직전기가 흐를 때 나는 소리도 싫고. 이 마을을, 이 자연을, 우리의 땅과 밭을, 우리를 위협하고 해치는 송전탑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전 주민들과 하는 이 인터뷰가 너무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시작을 해도 언제나 송전탑과 경찰, 한전 그리고 처절한 싸움의 기억으로 대화가 흘러가니까요.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목소리는 떨리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인터뷰를 계속하는 이유는 상처받은 밀양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추악했던 그들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물어보는 것이, 듣는 것이 혹시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찌르고 누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계속 물어보겠습니다. 계속 들을 겁니다. 아직도 밀양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끝나지 않은 밀양의 손을 놓지 말아 주세요. 할머니들은, 할아버지들은 자신을 위해 자식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싸우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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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 활동가 연말 시상


예변 정상규 변호사가 대표자 임명장을 출력할 일이 있어 문구점에서 상장 용지를 사왔다. 그런데 한묶음에 20장이들어 있어 상장 용지가 많이 남았다. 남은 용지로 예변은 아래와 같이 대책위 활동가들을 놀리는 장난질을 시작했고, 결국 자신도 부메랑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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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밀양의 촛불은 이제 172차를 지났습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촛불은 이어집니다. 지난 달에는 상동면 고답마을에서 세월호 유가족인 안산 단원고의 준형이 어머니 아버지를 모셔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할매 할배들이 자식 잃은 부모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상동면 여수 고답마을에서도 부북면 위양마을에서도 모두모두 닭백숙과 추어탕과 맛난 시래기국을 끓여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늘 촛불로 만나 밥 먹고 이야기 하며 노래 부를 것입니다.









순례 행사


11월에는 청도 할머니들과 함께 서울에서 1차 순례를 마쳤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기륭전자, 국회, 한국전력 본사 앞, 경찰청 앞, 원자력안전위원회, C&M 고공농성장,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대법원 선고 공판장까지 밀양 할매들이 서울을 누볐습니다. 


      ▲ 대법원 앞에서 판결에 항의하는 한바탕 큰 소동을 치르고 기자회견을 가지려 할때, 

           위양마을 동래댁 할머니가 쌍용차노조 이창근 기획실장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습니다.






밀양장터


두 번째 밀양장터는 밀양의 한복판 영남루 맞은편 고수부지 공터에서 치렀습니다. 미니팜 활동가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늦가을의 햇빛이 자글자글한 기막힌 날씨가 가장 크게 도와주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정성껏 마을별 먹을거리와 각자 지은 농산물을 들고 나왔고, 너른마당 식구들과 밀양 시민들은 벼룩시장에 각종 생활용품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이 만큼의 평화와 따뜻함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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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 듣기만 해도 설레게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황홀경을 흔들어 깨운 것은 바로 차가운 현실이었습니다. 미니팜에서 감 특판을 구상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보여준 말도 안 되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

 

공판장에서 80과가 든 감 1박스를 3천원에 사준답니다. 박스비가 천원, 인건비가 천원, 상하차비가 천원. 이렇게 감을 팔아서 10원도 남길 수 없는, 아니 그 사이 들어간 걸 하면 오히려 손해를 봐야 하는 농사를 짓는 할머니의 이야기. 송전탑이 들어서서 그것 바라보는 일 만으로도 속에서 불이 나는데 말입니다.

 

고정 마을 이순출 할머니의 송전탑과 농사,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우창]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와 함께 자서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순출 할머니의 일대기를 정리했던 연대활동가는 할머니를 '슈퍼우먼'이라고 표현했다.


웃지 못 할 풍년시절

 

김우창 (이하 김) : 올해 감 농사... 많이 어려우셨죠?

 

이순출 할머니 (이하 순출 할매) : 올해는 그랬지. 가격 때문에 너무 힘든데 또 되기는 되게 잘 됐고. 2년 딸 감을 올해 다 땄다. 작년에는 900박스 밖에 못 땄는데, 올해는 다 땄으면 2000박스도 넘는다. 그러니까 되기는 잘 됐는데 시세가 헐으니(싸니) 몸만 골병들고 쥐는 돈은 적고.

 

: 저번에 들으니까 감 한 박스가 3000원 이라고 하던데요.

 

순출 할매 : 맞다. 그래서 나도 저번에 더 따려다가 말았다. 그냥 뒀다. 뒤에 가면 못 딴 감이 한 가득이다. 우리는 박스 보조가 안 되면 하나에 1070원이다. 1070원 떼지, 카바예트도 돈이 적게는 안 들어가. 테이프, 테이프 그것도 돈 많이 들어가. 10만원 넘게. 카바예트는 20만원 넘게. 또 감나무에 약 치거든? 약 한 번 치려면 30~40만원 들고. 세 번씩 친다, 그거 들어가지. 비료 값 들어가지. 이래저래 다 떼고 나면 남는 거 없어. 3000? 오히려 우리가 감을 팔고도 5001000원 물어줘야 할 판이다.

 

: 이번에 미니팜에서 특판을 진행한 것도 그래서였거든요. 특히 할머니가 받은 문자. 이번에 도움은 많이 됐어요?

 

순출 할매 : 그렇지. 많이 됐다. 얼마나 고맙던지. 청과(농협)에만 냈으면 우린 망했을기다. 박스 값 떼고 뭐 떼면. 뭐가 남노. 그렇게 연대자랑 미니팜에서 많이 팔아줘서 그냥저냥 올 겨울 살 만큼은 됐어.

 

택호 대신 이름 부르는 정겨운 마을을 찢은 칼날.

 

: 할머니 고향은 어디세요?

 

순출 할매 : 고향은 상동면 신곡이야. 여기서 그리 멀진 않아. 거기서 자라고 이리로 시집 왔지.

 

: 근데 다른 마을은 거의 무슨 댁처럼 택호를 부르던데. 고정마을은 안 그런 것 같더라고요. 할머니들 부를 때도 성함으로 부르고. 그러면 할머니도 택호 있어요?

 

순출 할매 : ? 대봉댁. 고향에 있던 자그마한 뒷산 이름이 대봉산이어서 그렇게 붙여주더라. 우리 고정마을은 택호 대신 이름을 부른다. 지금도 내 팔 십 줄이 다 되가는데, 여전히 이순출, 이순출그렇게 부른다.



: 택호 대신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있어요?

 

순출 할매 : 택호 부르는 마을은 아마 그 사람 이름도 모를 거야. 우린 이름 부르니까 그만큼 더 정겹고 살가웠어. 그런 마을이었는데. 참 안타깝지. 저 송전탑 때문에. 우리 문중에는 지금 찬성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두 사람. 안타까운 건 그래버리면 집안사람이 먼저 등을 돌려버리더라고. 그래 사람들이 가만있나. “왜 그런 짓(송전탑 공사에 찬성을 한 것)을 하노라고 물어보지. (반대하는 사람들)한 사람이 한 마디만 해도 (찬성한 사람은) 정신없는 거지. 문중에 와서 입도 못 뗐다고 하데.

 

: 다른 마을처럼 고정마을도 마을끼리, 집안끼리 쪼개졌네요.

 

순출 할매 : (찬성한 이가) 이번 추석에 벌초하러 왔다 카데. 근데 얼굴은 못 봤어. 사람들이 다 싫어하니 문중에 못 오는 거지. 문중도 이 철탑 때문에 갈라져 버렸어. 알고 보니 자기네 할매, 할배, 아버지, 어머니 산소만 딱 하고 간기야. 이놈의 철탑 때문에 동네도 두 동네가 돼버렸지, 집안간도 갈라져 버렸지. 문중도 갈라졌지. 말이 아니다. 참 인심 좋고 서로 참 갈라먹고 그래 산 동네인데. 에이 진짜 칼날같이 너무 무서워.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한다고 그러지. 찬성한 사람은 왜 안 따라주느냐고 그러지, 너무 무서워. 너무한 세월이다.

 

누가 알겠노? 얼마나 외로웠는지 몰라.

 

자그마한 체구의 이순출 할머니지만, 한전이나 경찰과 싸우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나갔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기억하는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 할머니도 다른 어르신들처럼 한전, 경찰과 많이 싸우셨죠?

 

순출 할매 : 그렇지.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할아버지가 그런데 다 나갔고. 돌아가시고 나선 내 일이 됐으니까. 정부한테 우리가 밟힌 게 얼마나 많이 밟혔나? 경찰들한테 우리가 뜯겨가면서 이때까지 몇 년을 밟혀왔나. 너무 억울하다.

 

: 혹시 그렇게 싸우면서 무섭거나 두려우셨던 적은 없으세요?

 

순출 할매 : 여럿이 데모하러 가면 좀 나은데. 그런 날이 있었다. 절대로 잊지 못한다. 새벽 4시에 전화가 왔어. 한겨울에 4시라고하면 밤 중 아닌가. 전화가 와서 데모하러 와라그라데. 그래서 어디로 갈꼬?” 하니 고속도로 다리 밑 농성장으로 오라는기야. 그래서 부리나케 일어나서 나갔지. 누구 혹시 같이 갈사람 없는가 싶어서 요 (고정)삼거리에 서 있는데 뒷집 송순복이가 나오는 거야. 송순복이 아즈메, 고속도로 다리 밑으로 오라는 데요?” 라고 해서 갔지. 깜깜한지 앞에 가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이는 거야. 올라가니 한전놈들이랑 경찰놈들이 새까맣게 둘러싸고 있어. 이미 새벽에 다 올라 간 거지. 근데 우린 둘만 간거고. 그래서 그게 최고 기억에 남는 거야. 다리 밑 공사 시작할 때 겨울.

 

: 그럼, 새벽에 올라가서는 계속 그곳에 계셨던 거예요?

 

순출 할매 : 둘 다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핸드폰이 없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이리로 오라고 전화는 해야 하는데. 저놈들 두고 (핸드폰 가지러)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어찌해야하는가 기가 막혔어. 아무것도 없는 복판에 둘이 앉아있지, 우리 주위에는 새까맣게 경찰이 있지. 그래서 내가 (송순복한테) 물어봤지. “안 되겠다. 내가 갈래, 니가 갈래? 누구든지 가서 연락을 해야겠다. 더 나이 많은 내가 혼자서 지키는 게 낫지 않겠나. 니가 내려가서 전화 좀 해 사람들 데려와라.” 근데 말이 쉽지. 하나만 남겨두고 어찌 갈 수 있겠나. 아무리 핸드폰 좀 빌려달라고 빌어도. 한전놈도 안 주고, 경찰놈들도 없다고 하지. 안 빌려 주는 거야. 나중에는 새벽부터 나오느라 가스 불에 뭘 올려놨는데, 탄다고. 집에 불난다고 신고해야하니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했지. 근데도 아무도 안 빌려 주는 거야. 그래 갖고 이 사람(송순복)이 내려갔지. 길가에 서 있던 차에 문을 두드려서 핸드폰을 빌렸대. 그래서 빌려서 전화를 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저기서 싸우고 있는 거야. 고답가서. 우리는 여기로 오라 해놓고. 전화 받고 사람들이 왔는데도 10시 인기라. 근데 참 이상하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올라오는데 몸이 막 떨리는 거야. 사람이, 우리 식구가 올라오니까 얼마나 반갑겠노. 오자마자 내가 너거 밥 갖고 왔나라고 물어봤지. 밥 좀 달라고. 사람들이 챙겨온 주먹밥을 먹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그렇게 나겠노 시상에. 한겨울에 109번에서 비닐만 덥고 잘 때도 있었거든? 근데 그때도 사람이 여럿이라 힘이 났지. 근데 이건 뭐 몇 시간 동안 혼자 남겨있지, 경찰들이랑 한전놈들은 계속 공사하려고 장비를 올리지. 어찌나 황망하던지. 황당하더라고. 새벽에 비가 오는데 추워서 이가 부딪혀서 덜덜덜 소리도 크게 나고. 아 진짜 외롭대요. 그렇게 외로운 거는 처음 느껴봤어.

 

할머니와 함께 살고자 하는 가족의 꿈

 

: 싸우는 것에 대해 자제분들은 어떻게 말씀하세요?

 

순출 할매 : 자식들, 며느리 자주 전화하고. 감 따는 거 다 도와주고 그런다. 며느리는 여기 오면 밤새도록 나랑 얘기해. 꼭 붙어서 이런저런 얘기 하더라고. 나도 사람 좋아하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니까. 착한 며느리야. 며느리랑 아들은 여기 들어와서 살끼라고 했다. 근데 내가 안 된다고 했다. “안 된다. 내 혼자만 고생하면 되지. 너가 들어오면 저 밑에 손자들은 여기서 어떻게 공부시키나. 오지마라.”라고 말했지. 그렇게 말려도 들어오고 싶어 했어.

 

: , 그럼 아드님 내외가 할머니 모시면서 같이 살고 싶어 하시는 거네요?

 

순출 할매 : 그렇지. 여기 들어와서 함께 살고 싶어 했는데. 이 전기 때문에 다 날아갔지. 사실 할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농장 팔자고 여러 번 말했다. 이제 전기도 들어온다는데 팔자고 해 싸는 거야. 나는 반대했지. 자식 물려 줄 거라고. 고생해서 어떻게 모은 건데. 너무 안타까워. 억지로 들어오는 거면 모르지만, 저거들이 좋아서 들어오고 싶어 했거든. 며느리도 여기 들어와서 살고 싶다고 했고. 너무 안타까워.

 

: 아드님 내외분이 들어와서 함께 살고 싶어 하는데. 송전탑이 할머니를 여러 번 울리네요.

 

순출 할매 : 그래. 너무 억울하다. 억울해. 집도 다 선하지에 들어 가있지. 농장도 그렇지. 농장은 집보다 더 가깝다. 죄다 300미터 안에 들어가 있다. 산소도 전부 선하지에 들어가 있어. 우리 영감 산소도 그렇고. 이런 땅에 어떻게 아들, 며느리, 손자를 들어오라 하겠노. 날 모실라고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참 고맙지. 요새 사람들 안 그렇잖아. 어른들 모시기 싫어하고. 근데 이렇게 되니. 답답하지. 법도 참 더러운 법이야.

 

정겨웠던 마을과 이웃, 그리고 가족의 꿈도 송두리째 빼앗긴 이순출 할머니. 그럼에도 할머니에게 힘이 되는 것은 가족입니다. 뻔한 답이 예상됐지만 듣고 싶었습니다.

 

: 할머니는 그럼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소원, 꿈같은 거요.

 

순출 할매 : 최고 소원은 철탑 뿌시는거지. 저걸 뿌셔야 가족들이 여기 들어와서 살자나. 저거 뽑지 못하면 아들은 절대로 내가 못 들어오게 할 거야. 며느리 손자까지 절대 안 된다. 나 하나면 족하지...

 

철탑공사는 거의 완료됐고, 곧 전기도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한전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말하고 있지만, 지금도 가족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순출 할머니처럼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죠? 전기는 할매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요.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편리한 삶 뒤에는 한 가족의 꿈을 박살내는 진격의 송전탑이 서 있습니다. 철탑을 뿌시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질까요? 당신이라면, 당신과 함께라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밀양을, 밀양의 할매들을 기억해주세요. 그들을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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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이스마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니엘 퀸이라는 이가 15년에 걸쳐 쓴 책이라고 합니다. 소설 형식을 빌고 있지만, 인류사에 대한 자신의 공부와 현생인류의 문제점과 전망을 '이스마엘'이라는 고릴라의 입을 빌어 피력하는 에세이 같은 책입니다.

좀 길고 장황하지만, 인류사를 농업혁명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서 농업혁명 이후부터 오늘날 우리 지구촌의 환경이나 살림살이가 이 지경으로 망가졌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B.C.8000년 무렵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잉여농산물을 저장하면서 문명이 발달했는지는 모르나 사람이나 자연에 대해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역사시대라는 것도 모두 농업혁명 이후의 이야기들이지요. 저자는 농경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기간이었던, 대략 3백만년 전부터 B.C.8000년경까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게 잘 살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선사시대이니까 당연히 기록은 없지만 몇 개의 오래된 두개골과 동굴의 벽화로 보면, 역사시대 이전에 이 행성에 인류가 살았던 시간이 말할 수 없이 길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동의가 되진 않았습니다만, 뭐랄까 우리의 상식을 한번 신랄하게 뒤집어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래, 글은 선사시대 수렵채취인과 오늘의 현대인인 '문화선교사(역할 맡은 자)'와의 대화입니다. 저자세의 화자가 수렵채취인이고, 잘난 체하는 어투가 바로 농업혁명 이후 산업사회로 들어선 잘난 우리 시대 사람들의 말투입니다. [이계삼]

 

 

 

"...........나리, 나리께서는 우리한테 우리가 사는 방식이 비참하고 그릇되고 수치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나리께서는 우리한테 그건 사람들이 살게 되어 있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린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나리. 왜냐하면 수천 년 동안 그건 우리에게 좋은 삶의 방식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나리께서, 별에도 가고 당신의 말을 생각의 속도로 전 세계에 보내는 나리께서, 우리한테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나리의 말씀을 들어봐야만 하겠습니다."

 

"...., 너희가 사는 방식이 너희에게 좋아 보인다는 건 나도 안다. 그건 왜냐하면 너희가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나리. 우리는 나리의 교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한테 왜 우리의 삶이 비참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지 말씀해 주십시오."

 

"너희의 삶이 비참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건 너희가 짐승처럼 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황당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어.

 

"이해가 안 됩니다, 나리. 우리는 다른 모든 생물이 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세상으로부터 얻고 나머지는 남겨 둡시다. 사자나 사슴이 하듯이 말입니다. 사자나 사슴도 수치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아니다. 하지만 그건 한낱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는 건 인간에게는 옳지 못하다."

"."

이스마엘이 말했어.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식은 옳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살면.... 너희가 너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리?"

"너희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 너희의 식량 공급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리. 우린 배가 고프면 나가서 먹을 걸 찾습니다. 더 이상 무슨 통제가 필요합니까?"

 

"만약 너희가 직접 먹을 것을 심는다면, 더 많은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나리? 누가 먹을 것을 심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만약 네가 직접 먹을 것을 심는다면, 먹을 것이 거기에 있다는 걸 명확하게 알게 된다."

이스마엘은 유쾌하게 껄껄 웃었어.

 

"우릴 놀라게 하는군요, 나리! 우린 이미 먹을 것이 거기 있다는 걸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생명 세계 전체가 먹을 것입니다. 밤사이에 그것이 없어지겠습니까? 그것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날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언제나 거기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린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못할 겁니다."

 

"그래. 하지만 만약 너희가 직접 심으면, 얼마나 많은 음식이 있는지 통제할 수 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 올해는 고구마가 더 많이 나겠군. 올해는 콩이 더 많이 나겠군. 올해는 딸기가 더 많이 나겠군."

 

"나리, 그런 것들은 조금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풍부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왜 이미 자라고 있는 것을 심기 위해 고생을 해야만 합니까?"

"그래, 하지만.... 먹을 게 떨어져 본 적은 없느냐? 고구마를 먹고 싶은데, 야생에서 자라는 고구마가 없는 경우는 없었느냐?"

",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나리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리께서도 고구마를 먹고 싶은데, 나리의 밭에서 자라는 고구마가 없는 때는 없습니까?"

'없다. 왜냐하면 만약 고구마가 먹고 싶으면, 우린 가게에 가서 고구마 통조림을 사면 된다."

"그렇군요. 그런 체제에 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말해주십시오, 나리. 나리가 가게에서 사는 고구마 통조림, 그 통조림이 나리를 위해 거기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했습니까?"

", 수백 명은 되겠지. 키우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트럭 운전사, 통조림 공장에서 씻는 사람, 기계를 돌리는 사람, 통조림을 상자에 넣는 사람, 그 상자를 유통시키는 트럭 운전사, 가게에서 상자를 푸는 사람, 기타 등등."

 

"죄송하지만, 고작 고구마에 관한 문제로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다니, 미친 짓처럼 들리는군요, 나리. 우리 종족들은 고구마를 먹고 싶으면, 가서 하나를 파내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고구마가 하나도 없으면, 고구마만큼 좋은 다른 걸 찾으면 됩니다. 고구마를 손에 넣기 위해 수백 명이 노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희는 요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나리."

 

난 한숨을 참았어.

 

"들어 보거라, 요점은 이것이다. 만약 너희가 자신들의 식량 공급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세상에 좌우되어 산다. 항상 충분히 먹을 게 있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들의 변덕에 맞추어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인간이 사는 방식이 아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리?"

"... , 어느 날 너희가 사냥을 나가서 사슴 한 마리를 잡아왔다. 좋지, 그것 좋지. 기막히지. 하지만 너희는 사슴이 거기 있는 걸 통제할 수 없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나리."

"좋다. 그 다음 날, 너희는 사냥을 나가지만 잡을 사슴이 없다. 그런 적 없느냐?"

"물론, 있습니다, 나리."

", 보거라. 너희가 사슴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는 사슴이 없는 것이다. 그럼 너희는 무얼 하겠느냐?"

 

이스마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어.

"우린 토끼를 두어 마리 잡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만약 너희가 원하는 게 사슴이라면, 토끼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럼 그게 우리가 수치스러운 삶을 영위한다는 이유입니까, 나리? 그게 우리가 사랑하는 삶을 제쳐두고 나리네 공장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까? 우리한테 사슴이 안 나타나 주어서 토끼를 먹는다고 해서 말입니까?"

"아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보거라. 너희는 사슴을 통제할 수 없다. 토끼 또한 통제할 수 없다. 너희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도 없고 토끼도 없다고 가정해 보거라. 그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럼 우리는 다른 걸 먹습니다, 나리. 세상은 먹을 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봐라. 만약 너희가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다면..."

난 이스마엘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였어.

"봐라, 세상이 언제나 먹을 것으로 가득 차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너희는 가뭄이 든 적이 없느냐?"

"있고 말구요, 나리."

"그럼, 그때는 어떤 일이 생기느냐?"

 

"풀들이 시들고 모든 식물들이 시듭니다. 나무엔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사냥감이 사라집니다. 육식동물이 감소합니다."

"그럼, 너희한테는 어떤 일이 생기느냐?"

"만약 가뭄이 아주 심하면 우리 또한 감소합니다."

"너희가 죽는다는 말이렷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나리."

"! 그게 바로 요점이니라!"

 

"죽는 것이 수치스러운 겁니까, 나리?"

"그렇진 않다... 알았어. 이게 요점이니 들어 보거라. 너희가 신들에 좌우되어 살기 때문에 너희는 죽는 것이다. 동물이라면 괜찮지만, 너희는 그렇게 무지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을 신들에게 맡겨선 안 된다는 겁니까?"

"절대 안 되고 말구. 너희의 삶은 너희 자신에게 맡겨야만 한다. 그게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스마엘은 머리를 저었어.

"정말 유감스러운 소식이군요, 나리. 기억할 수 없는 시간부터 우린 신들의 손에서 살았고 우리가 볼 때는 잘 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키우는 노동을 전부 신에게 맡기고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충분한 먹을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보십시오!-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준엄하게 말했어.

 

"너희는 여기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를 보아라. 너희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너희는 알몸에, 집도 없다. 너희는 안전도 없이, 안락도 없이, 기회도 없이 살고 있다."

"그럼, 그게 우리가 신들의 손에서 살기 때문입니까?"

"그렇고 말고. 신들의 손에서는 너희가 사자나 도마뱀이나 벼룩과 다름없이 하찮은 존재이니라. 이 신들-사자나 도마뱀이나 벼룩을 돌보는 신들-의 손에서 너희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너희는 먹여 살려야 하는 또 하나의 짐승에 불과하다. 잠깐만."

난 이렇게 말하고는, 한 이 분간 눈을 감았어.

"됐어, 이게 중요하다. 신들은 너희와 다른 생물 사이에 구별을 짓지 않았느니라. 아니, 이것도 아니군. 기다려."

 

난 다시 생각을 하고 나서 말을 했어.

"이거야. 너희가 동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신들이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너희 스스로가 알아서 제공해야만 한다. 신들은 더 이상 제공해 주지 않을 것이니라."

이스마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어.

"신들이 우리한테 주지 않은 것 중에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까, 나리?"

"그래, 그런 것 같다. 신들은 너희한테 동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주었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그 이상의 것은 주지 않았느니라."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리? 어떻게 신들은 우주와 세상과 세상의 생명을 만들 만큼 지혜로운데, 인간한테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주는 지혜는 없을 수 있습니까?"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니라. 인간은 3백만 년 동안 신들의 손에서 살았고, 3백만 년이 끝나가도 인간이 출발했을 때보다 더 나아진 것도, 더 나아간 것도 없다."

"정말이지, 나리. 이상한 소식이군요. 무슨 신들이 그렇습니까?"

난 코웃음을 쳤어.

"그들은 말이다, 형제들이여, 무능한 신들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신들의 손에 달린 너희 삶을 온전히 다 찾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너희 삶을 너희 자신의 손에 온전히 맡겨야만 한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 합니까, 나리?"

"이미 말했듯이, 너희는 너희가 먹을 식량을 심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뭘, 어떻게 변화시키겠습니까, 나리? 우리가 심든 신들이 심든, 먹을 것은 먹을 것입니다."

"바로 그거다. 신들은 너희한테 필요한 것만 심는다. 너희는 너희한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심을 수 있다."

"무슨 목적으로 말입니까, 나리? 우리한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져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젠장 할!" 난 소리쳤어. "알아들었어!"

 

이스마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식량을 가져서 무슨 좋은 점이 있습니까?"

"그게 빌어먹을 요점이니라! 필요 이상의 식량을 갖게 되면, 신들은 너희한테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신들한테 콧방귀를 뀔 수 있겠군요."

"그렇고 말고."

"그렇다하더라도, 나리. 만약 우리한테 그 식량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걸로 무얼 해야 합니까?"

 

"저장하거라! 저장을 했다가, 신들이 너희가 굶주릴 차례라고 결정할 때 신들을 훼방 놓아라. 저장을 했다가 신들이 가뭄을 보낼 때, 이렇게 말하란 말이다. '난 안 되오. 난 굶주리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도 그건 어찌할 수가 없소. 왜냐하면 내 삶은 이제 내 손 안에 있기 때문이오!"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고릴라 이스마엘, 평사리, 30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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