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밀양에서의 삼일을 떠올리며


하자작업장학교 조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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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또 자고를 반복했다. 아무리 자도 버스는 고속도로 위였다. 잠을 통 못잔 터라 꿀 같은 시간이었지만 몸소 느껴지는 밀양과 서울 간의 먼 거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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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후쿠시마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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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본격적으로 밀양 여수마을에서 일손 돕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갔던 곳은 감나무 밭이었는데 신기하리만큼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밀양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열심히 따보자!’ 다시 다짐했다. 감을 따려고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는데 둥근 잎들 사이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얀 가을 햇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매료되었고 이내 다들 이곳이 한국이 맞는 것이냐며 놀라워했다. 이런 장면은 TV속 광고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나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름답다고만 하기엔 부족한,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형용사 안에서는 별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여수마을 곳곳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건. 떨어진 홍시를 주어먹으며 건너편에서 일렁이고 있는 벼들을 보고 있으면 황금빛벌판이라는 김소월시인의 표현은 이런 곳에서 나왔겠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마냥 감탄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한창 한전과 정부에서 765kV 송전탑 공사강행을 하고 있는 밀양이었다. 일을 하는 내내 산 너머에서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이곳에서의 평화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저쪽 산 중턱에서의 대치, 그 간극에 마음이 답답했는데 얼마 안 있어 이곳 또한 평화롭지 않은 곳임을 깨달았다.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헬리콥터는 멀리서의 모습과 소리뿐이었지만 날 불안하게 만들었고 아침마다 마을회관 앞에서 경찰들이 대거 버스를 타고 와서 교대하고, 일터와 마을회관을 오가는 길에 종종 우리들의 신원을 파악하려하는 사복경찰들을 마주하며 더 이상 쉽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일터와 마을회관 외의 장소를 갈 때는 무조건 누군가와 함께 가야했고 함께 있더라도 긴장을 하면서 수시로 주변을 살펴야했다. 그제야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안고 사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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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모습이 모리즈미 다카시 선생님의 사진과 서경식 선생님의 말에 겹쳐서 생각나기 시작했던 건 그 이튿날 오후(우리는 일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났기에 평소보다 두 배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을회관 뒤편에서 소에게 건초를 주었을 때부터였다. 가만히 소들을 보고 있다 보니 마을에 고압송전탑이 생기면서 소와 돼지들이 죽거나 새끼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후쿠시마에 들어가 남아있는 동물들의 모습, 그리고 주변 마을에서 소들을 살처분하기 위해 트럭에 떠나보내는 모습이 찍낙농가가 찍혀있던 사진들이 다시 펼쳐졌다. 서경식 선생님의 표현처럼 ‘원전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뿌리째 뽑힌 사람들’의 그 이전의 삶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곳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뿌리 딛을 땅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사그라질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것들로 보였다. 무서운 일이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그들의 일상의 자리만을 보았을 때는 잘 몰랐던 것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상 한가운데 서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가슴 속에 훅 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 이후에도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밭을 갈구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삶을 지속하고 있는 분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는 일을 적극적으로 강행하는 게 정부라니 소름 돋는 사실이었다.


슬픔을 넘어서 하는 축제를 꿈꾸다


셋째 날 저녁에는 상동역에서 열린 122번째 촛불문화제에 함께 했다. 역 앞이 꽉 차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아이쿱에서 준비한 맛있는 저녁식사를 연신 감탄하며 먹은 후 시작된 문화제. 얼마 전 트랙터를 몰고 친구네 집에 일손 도우러 가는 길 의경과의 사고로 연행된 주민(박진호 님)의 부인(김영숙 님)의 이야기로 문화제를 시작했다. 일감이 너무나, 정말 너무나 많은 지금 자기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펑펑 우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남편 걱정에 괴로우실텐데 이내 마음을 추스르시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큰 절을 올리시고 내려가셨다. 10월 초 헬기장에서 연행되어 구속 수감 중이신 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곳곳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찰을 상대하다보면 당혹스럽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있다. 이유는 경찰이라는 존재가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들 또한 위에서 내린 지시로 움직이기에 안쓰러운 맘이 들기도 한다는 것 때문이다. 밉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울적하고 답답해진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인지. 물어볼 길이 없다.


그런 마음을 위로해준 것은 이어진 즐거운 공연이었다. 흥겨운 판소리와 시원한 노래 그리고 밀양 어르신들에겐 손녀들의 장기자랑과 같은 성미산 학교 몸짓 팀의 군무들이 이어졌다. 밀양에 관련된 일이면 발 빠르게 앞장서있는 성미산 학교는 정말 든든한 팀이다!


문화제가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들은 마무리를 위해 서둘러 바투카다를 매고 무대로 올라갔다. 연주를 시작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밀양 주민들, 여러 단체에서 오신 분들과 학생, 선생님들 사이를 행진하며 상동역 앞마당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에는 모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있었다. 시끄럽고 신나는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환호하고, 가슴을 억누르고 답답했던 것들을 뻥이요~와 같은 바투카다 소리와 함께 펑, 펑, 펑!


페스테자 활동 처음엔 공연하는 것에 몰두했던 나였다. 나의 모습에 나의 악기 연주에 우리들의 합에. 그런 나에게 포르투갈어의 슬픔(tristeza)과 축제의 뜻(festijo)를 섞어 슬픔을 넘어 노래와 춤을 추고 싶다는 페스테자라는 팀은 어려운 팀이었다. 슬픔을 넘어서 하는 축제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정도의 시야 안에서 고민하며 머물러 있던 내가 ‘페스테자가 이런 거구나’ ‘우리는 이런 팀이구나’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서였다.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바투카다를 들으시면 춤을 추시고 끝나고도 다시 신나게 노래를 부르실 수 있게 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통해 슬픔이 축제로 바뀌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스테자라는 팀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팀에서 죽돌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런 힘들을 가능하게 하는 학교가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행사가 끝나고 속 시원한 모습들, 든든한 마음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구호를 외치며 사진을 찍고 가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한 번 더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잘 됐다고.


그 날 마을회관에 몇몇 분들이 들러주셨다. 너희들은 지금 밀양만이 아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세상은 50년 뒤가 되어서야 조금 바뀔 것이라고 당장에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꾸준히 관심을 갖고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참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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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다시 가을을 맞으며 


다음날 오전 일을 마치면서 밀양 여수마을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짐정리를 한 뒤 마을회관 앞에서 이빨을 닦으며 거대한 산에 주렁주렁 감에 논들을 보고 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고 그렇기에 슬픈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결국 송전탑 건설부지 산에는 오르지도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우리가 들어갔던 마을까지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각자 열심히 딴 감을 대충 계산을 해보니 삼일간 몇 백 박스는 딴 것 같다는 히옥스의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물론 그에 못지않게 많이 먹고 왔지만...). 버스를 타니 버스 위 열린 창문으로 나뭇잎들과 전깃줄, 그 위의 파랗고 높은 하늘이 보였다. 도시에 가면 저 위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문득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일까 싶었다. 내가 일했던 감나무 밭 할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가서 시골 같은 곳에 시집가지 말라했지만 어쩐지 도시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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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돌아와 도시에서 맞는 가을은 너무나 초라하다. 요즘은 한가을임에도 낙엽을 밟을 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된 거리가 더욱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 하루는 집에서 음식물 퇴비를 만들려고 모아온 낙엽을 바라보다 문득 도시만큼 재미없는 곳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곳에서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매년 좋아하는 사람들과 후에는 내 아이를 대려와 보여주고 싶은, 밀양은 그런 곳이었다. 아마 내가 가보지 못 해서 그렇지 대한민국 이곳저곳에는 아직 그와 같은 곳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모쪼록 남아있는 각자의 고향, 마을과 자연들 그 모든 것들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난 숲에 부리로 한 방울 한 방울 미미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숲을 구하려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크리킨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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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번 가을은 밀양에서 보내주신 감 덕분에 아주 맛나고 풍성한 가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감 한 상자에 들어가는 수고를 확실히 알게 된 이번 가을이기에 더욱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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